행복한 상자

동화책

sav.. 2008. 11. 4. 23:07


 

내가 어릴적 살던 곳은 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다니고 사방이 작은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동네였다. 아마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느 날 앞집에 누군가가 이사왔고 그 중 또래인 그녀는 곧 나와 친구가 되었다. 아버지가 군인 장교라 강원도 원주에서 모두가 감자먹던 시절 그녀만은 쌀밥을 먹었다고 들었던 기억도 나고 그녀가 그곳에서 새 로 산 아주 이쁜 빨간구두를 잃어버렸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도 난다. 물론 그 사연은 다 잊어버렸다. 그저 나에게는 빨간구두가 그녀의 첫인상과 맞물려 기억되고 있는가 보다. 나에 비하여 그녀의 엄마 아빠는 무척 젊었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아이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관심을 가져줘야 하는지도 아는, 당시의 신세대부부였던 것 같다.  

나는 집에 마땅히 읽을 책도 없었지만 동화책은 더더욱 없었다. 그 시절 나는 그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놀거나 혹은 만화책방에 가서 만화 보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날, 그녀의 집에서 나는 빨간 동화책이 가득한 책장을 보고 "저거, 다 읽어? 재밌니?" 이렇게 물었던 것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이후 난 집에 와서 엄마에게 "나도 책 좀 사줘" 아마 그랬었는지,, 당시 엄마가 "책 많잖아. 너 어깨동무도 보잖아." 했던 말이 기억난다. "아휴 그건 책이 아니고,,," 그리고 그만두었다. 일제와 6.25 등 시대적 배경과 당신의 파란만장한 삶으로 본의 아니게 가방끈이 짧았던 우리 엄마는 글자를 겨우 쓰고 읽을 줄 알았던 터였고 또한 그나마 책은 불경밖에 읽은 적이 없었기에 그때의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동화책이 무언지도 몰랐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도 그때는 동화책 속을 들여다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므로 나도 그때는 동화책이 무언지 몰랐다. 이제 생각해보니 나는 동화책 같이 고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많은 옛날이야기와 사람들의 사연들 그리고 귀신이야기들을, 남보다 재밌게 말씀하실줄 아는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었다. 나의 어린시절의 소양은 이런 것으로 닦이지 않았을까.

그녀는 가끔 동화책을 읽은 소감을 간단히 말했고 나는 그냥 들었다. '그게 참, 재밌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리고 그녀의 집 뒤에는 작은 시냇가가 있었고 뒷마당엔 작은 꽃밭이 있었는데 꽃밭에서 노는 걸 좋아했던 그녀가 꽃이름을 가르쳐 주는대로 나는 따라하며 "응, 칸나구나.." 했던 기억이 난다. 시냇물 흐르는 개울 가운데의 섬처럼 생긴 땅에 토끼를 풀어놓고, 토끼주려 열심히 토끼풀을 뜯으며 서로 이야기하고 넓은 돌을 모아 방을 만들고, 부부처럼 소꼽놀이도 하고, 나의 전쟁놀이에 끌어들여 다른 동네 친구들과 전투도 하게 하고, 가끔 내가 좋아하는 참기름 가득 부은 김치볶음을 진짜로 해주기도 하고... ㅎㅎ 어린시절 나는 마치 프로듀서처럼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내고 때론 배역도 맡기며 할만한 모험을 다 하는 신나는 삶을 살았었고, 그녀도 나와 함께 노는 것이 즐거웠었는지 내성적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하자는 놀이는 뭐든지 기꺼이 함께 놀아주었다. 불꽃처럼 화려한 그 시절, 귀여운 마음, 꾸밈없는 생각과 행동들... 그립기도 하다.

예전부터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마음이 여전히 깊고 따뜻한 그녀가 최근 블로그로 사진을 한장 보내왔다. 놀랍게도 그때 동화책을 여전히 갖고 있다고. 그때 나에게 읽어보라며 재밌다고 권한 "소공녀"도 저기에!... 아, 참 오래된 책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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