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ly days

인연

sav.. 2011. 3. 3. 01:54

성산동, 풀과 작은 들꽃들이 듬성듬성 나 있는 한적한 철길을 따라 서쪽으로 한 20분정도 걸어서 북가좌동의 좀 오래된 연립주택 마당에 들어섰다. 사실 어제도 왔었던 곳이다. 잠시 고개를 들어 두리번대며 어제 본 집 모습을 기억해 다시 한번 확인하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2층 문 앞에서 또 잠시 서성였다. 저녁 때라고도 할 수 있으니, 너무 정확한 시간에 방문하는 것보다 약 몇 분후가 더 좋겠지라는 생각에 약속된 시간보다 조금 지난 저녁 7시 5분에 초인종을 눌렀다.

어? 그런데 안에서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상하다. 분명 오늘 이시간에 온다고 했는데... 중간마다 잠시 텀을 두며 조심스럽게 초인종을 세번이나 눌렀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인기척이 없었다. 문득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자 마음이 급해진 탓인지 초인종을 무시하고 나는 주먹으로 문을 직접 두드리고 있었다. 점점 세게...

"쿵 쿵 쿵!"

포기하고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안에서 반가운 인기척이 들리는 것 같았다. 곧 철커덕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한서른쯤 돼 보이는 단발의 부드러운 턱선을 가진 동그란 얼굴의 여자가 얼굴을 먼저 내밀었다. 모습이 차분하고 단아해 보였지만, 눈 앞에 나를 보고도 오늘 내가 방문할 거라는 것을 전혀 생각도 못했다는 듯 좀 놀란 표정이었다. '그런데 왜 저런 표정인거지??'

"... 무슨 일이시죠?" 약간의 경계를 하듯 살짝 거리를 두고 그녀가 먼저 말을 했다.

약속대로 제시간에 왔는 데도 문을 빨리 열지 않은 데다가, 날 처음보는 듯한 그녀의 이상한 태도에 좀 기가 막히고 있었지만, 그런 표시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아니... 오늘 만나기로 했던... 그러니까... 계약하러 왔는데요."
나를 모르는 듯한 그녀의 그런 표정 때문인지 무엇부터 말을 해야할지 나 역시 주춤대며 말했다.

"네에?"
그녀는, 누구지?도대체 뭐지?라는 표정 속에, 좀 전의 약간 귀여웠던 동그란 눈동자는 벌써 호수처럼 커져 있었다.

"기억 안나세요?, 계약하러 오늘 이시간에 만나기로 약속을 해서 왔는데...

어제 분명히 내일 7시에 제가 여기로 온다고 저랑 약속 하셨거든요. "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방금 꿈을 꾸다 깬 사람처럼
"뭐라구요? 제가 학생과 어제 약속을 했다구요? ...내가 정말?..." 

아마도 '그러니까, 그러니까 생각을 해보자구. 이 상황이 뭔지...' 자꾸만 이런 소리가 반복되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머리 속이 매우 복잡해 보였다. 혹은 자
기가 정말 약속을 잊은 게 아닌지, 스스로를 반신반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어리버리한 태도 때문에도 나는 더 확실한 태도를 취해야했다.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면 기억이 나겠지라며, 더욱 분명하게, 아까보다 더 힘을 주어 말을 했다.
"어쨌든, 여기 방 세놓은 거 있지요? 맞죠?" 
"사실... 우리집에도 빈방이 있기는 한데... 하긴 곧 세를 놓을 생각은 했었는데.."
그렇죠! 맞잖아요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그런데 대체 왜 그러시는 건지...

그녀는 약간 머리를 비스듬히 세우며 또 혼잣말처럼 말하고 있었다.
"근데 이상하네.. 빈방이 있긴 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아직 안 내놨었는데, 내가 내놨다니... 언제 그런거지?...."

그 말에 나는 얼핏 좀 이상하단 생각을 하면서도 빈방이 있다는 사실에, 착각일지도 모를 그녀의 뒷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또 아무리 생각해도 난 분명 그 집이 맞다고 생각해서 찾아온 것이다보니 내 목소리와 말투는 너무나 확신에 차, 그녀마저 자신 스스로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인지, 점점 더 혼란스러움에 휩싸이는 듯했다.

"어쨌든, 약속대로 계약하러 왔으니 그 빈방을 다시 한번 보여 주세요."
"네? ... "

잠시 머뭇대더니,
나의 단호함 때문이지 그녀는 마치 힘겨루기에서 밀린 듯, 곧,
"어차피 세 놓으려 했으니, 그럼 한번 방을 보시겠어요. 들어오세요."

여태까지 그녀는 그녀의 말을 하고 나는 나의 말을 하며, 그래도 이 엉뚱한 대화 끝에 뭔가 말이 된 듯 나는 그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렇게 밀고 들어갔던 그 느낌이, 그녀에게 마치 강한 파도가 밀려드는 모습과 같았을 거라고 생각된다. 그녀는 그냥 나의 확신에 밀린 것이다.

출입문에서 곧바로 주방을 쳐다보며 우측에 문이 나있는, 역시 내가 어제 보았던 그 똑같은 위치의 방이었다. 그녀는 친절하게 손잡이를 돌려 방문을 열어주며,
"이 방이에요."라고 말했다.


아... 근데 환한 것이... 왠지 더 깨끗해진 것 같았다. 천천히 방을 둘러 보던 중 창가로 다가가 창을 열고, 나무가지 사이로 무심코 창밖을 내다 보았다. 그런데 '엇, 이럴수가!' 막바로 보이는 또하나의 연립주택이 이 집과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이 생긴 마당에 놓여있는 게 아닌가! 아니 그럼... 아뿔사! 어쩐지 그녀의 처음 표정이....  아, 맞아, 저 집 같아! 뒤에 똑같은 집이 또 있을 거라곤 난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갑자기 좀 전의, 그녀를 처음 본 때에 여러 가지 이상한 점을 소홀히 여긴 내가, 정말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부터 해서, 어제 본 방과는 어쩐지 좀 다른 내부 모습들이 스쳐갔다. 심지어 주인여자의 외모가 달랐던 것까지도 갑자기 조금씩 생각나는 것이었다. 이럴수가 있나.

똑같이 생긴 다른 집에 와서 생전 처음보는 사람에게 왜 날 몰라보는지, 또 왜 이 중요한 약속을 잊었는지 그것에 대해 사살상 나의 착각인 것을 모르고 대뜸 큰소리를 쳤던 것이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그녀를 등지고 창밖을 바라보는 내 얼굴이 그녀 몰래 너무나 뜨겁게 화끈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방문 앞에서 지금 내 뒷 모습을 보고 있을텐데...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어제 본 여자를 기억하지 못한 거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미스테리다 미스테리...' 창가에서 순간 스쳐가는 많은 생각들에 비해 실상은 짧은 시간들이 흘렀다. 나는 이 '우연'에 그냥 놀라고 또 놀라며 그렇게 서있었다. 

계약하러 온 것이니 너무 오래 있을 수가 없어 뒤돌아서 그녀를 향해 걸어갔지만, 끝내
 그런 사실들에 대해 난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이 집 주인인 그녀와 이 방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계약을 하자는 나의 말에 그녀는 웃으면서 흔쾌히 방을 내주었다. 

재미있게도 그녀는 부동산에 내놓은 적도 없이 우연히 세입자를 구했고, 나는 더 깨끗한 방과 마음에 드는 주인을 같은 조건에 우연히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일 때문에 결국 나는 뒷 집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아니 그 뒤에도 미안해서 마주칠까 걱정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것은 정말 우연히 일어난 새로운 인연이었고, 다시 돌아보았을 때 내겐 아주 잘 된 일이었다.

'Lovely day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식의 반전  (4) 2011.01.12
Nostalgia  (20) 2010.09.29
창밖에 비가 오면...  (2) 2010.05.08
이 시간, 봄은 어디에...  (2) 2010.03.23
삶의 인식  (10) 2010.03.16
요즘... 세상  (10) 2010.01.06
변화의 가능성  (6) 2009.09.01
  (12) 2009.01.23
우리 빠다, 미니핀의 귀여운 모습  (12) 2009.01.14
나는 뮤직쉐이커?  (14) 2009.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