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태도
벌써 몇년 전 일이다. 장미빛 인생 마지막회를 보다가,
조용히 숨을 참으며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이내 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
"연기자들이 연기를 참 잘해서 말야.."하며 싸비를 향해 얼굴을 돌렸을 때,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눈이 빨갛게...
예전 같으면 병으로 죽는 드라마를 보고는 울지 않았던 나였다.
나는 인간의 生死를 지극히 당연한 삶의 일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내가 어렸을때 살았던 산 속의 조그만 마을에서, 어느 해를 중심으로 한 3년간
사람들이 두 달에 한 번 꼴로 죽어나갔었다. 특정한 기간동안이었고 참 이상한 일이었다.
자연사도 있고 지병도 있고 자살도 있었고...
대개가 남자들이었고 한다리 걸치면 아는, 아무개의 아버지이고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하고... 그것이 어린시절부터 죽음에 대한 슬픔보다 두려움을,
두려움은 다시 죽음에 대한 태연스러움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과 감정은 사랑하는 싸비가 아프면서 달라지게 되었다.
우리 자신의 죽음은 타인의 죽음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마다 개인적인 오직 하나의 죽음만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먹구름이 올 줄 알았다면...
그 해는 이산 저산 공기 좋은 곳을 찾아 6월부터 텐트를 치고 다녔었다.
어느 날 아침, 유명산자연휴양림 오토캠핑장에서 자다가 벌떡 일어난 싸비가
손가락들이 유리조각처럼 쨍하고 깨지는 느낌이라며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우리는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근처의 가까운 병원을 찾게 되었다.
재활의학과에서 퇴행성관절염이라는 소리에, 아니 벌써... 하며
돌아오는 차안에서 눈물 가득 고인 눈을 서로 감추고 싶어했다.
그녀는 봄부터는 어깨와 등이 무겁고 아프다고 했고
나와 같이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기 시작했다.
나는 살면서 가까운 이들이 입원할 정도로 아픈 적이 한번도 없었기에
그녀에게 병원에 가보자는 말도 한번도 하질 않았다.
만약 정말 아프기라도 하면... 그건 더 두려운 일이었기에 애써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 후 몇 달 후에 우연히 싸비의 목에 톡 불거져 나온 혹을 내가 발견하게 되었다.
"어? 혹인거 같은데... 딱딱해. 이게 뭐지?" "아퍼?" "아니 안 아파."
병원에 갔는데 내분비내과 의사는 외과로 보내 정밀검사를 시켰고
목에 있는 혹 중에 악성은 5%밖에 안 되니 너무 걱정말라고 했다.
나는 정말 아닐 거라고 했지만...
나중에 들었는데 싸비는 그 때 예감이 아주 안 좋았다고 했다.
아니나다를까... 갑상선 암이라고 했다.
우리는 순간 이상하게도 남의 일처럼 초연했고, 의사는 별거 아니라고,
완치율이 높으니 수술 받으면 된다고 말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퇴행성관절염엔 그렇게 눈물이 나더니 암이라는데...
알고보니 병보다 더 무서운 부작용의 우려
수술 전 날, 병원에서 첫 날을 보내는 밤이었다.
의사의 수술 후에 생길 부작용에 대한 설명은 정말 무시무시한 내용이었고
또 자신들은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다는 내용들 이었다.
차라리 일찍 말하지... 최악의 부작용은 하나가 아니고 여러가지 였다.
고민은 깊어져 갔다. 이 중요한 수술을 여기서 하는 게 옳은 일인가?
더 큰, 유명한 병원으로 지금이라도 옮겨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다가 시간이라도 지체되면 어쩌지? 수술을 앞 둔 환자와 그 가족들은
이런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동안 얼마나 괴로웠을까?
수술실 앞, 길고 긴 시간
다음 날, 수술실로 가기 위해 이동침대에 오른 싸비에게 간호사는 수술 전에 필요한 주사이고 "좀 아플거예요."하며 주사를 놓는데... 순간 돌아서서 난 그만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고야 말았다. 눈물이 멈춰지질 않았다. 수술실 입구에서 꽉 잡은 내 손을 놓고 왼쪽으로 돌아 사라질 때까지...
수술실 문 앞은... 누구나 그 안으로 들어가면 生과 死를 알 수 없게 되기에
두 손이 저절로 모아져 나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존재를 부르게 하는
겸허한 기도가 마음 속에서부터 그냥 우러 나오는 그런 곳이었다.
난생 처음 수술의 보호자가 된 나는 모든 수술하는 사람과 보호자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그제서야 제대로 공감할 수 있었다.
수술이 끝나 보호자를 찾는 전화를 받고 몇시간 전에 헤어졌던 수술실 입구로
뛰어가 기다리고 있는데, 곧 싸비의 침대가 문밖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나를 언듯 보았는지 다 못뜬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채 그녀는 날 불렀다.
나는 "응, 나야... 괜찮아?" 그녀는 "응, 괜찮아." 낮고 조용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힘들게
말하면서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날 저녁, 시기가 좀 늦어서인지 갑상선을 다 제거해야만 했고
또한 예상하지 못했던 전이로 목의 오른쪽 임파선까지도 제거해야만 했다고...
그러면서 의사는 평생 갑상선 호르몬과 칼슘(부갑상선의 손상)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부갑상선의 완전 제거는 의료사고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사랑... 실갱이
우리는 일주일 후에 퇴원을 했지만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방사선 치료를 해서 조금이라도 남겨진 갑상선을 완전히 제거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갑상선기능을 일부러 떨어뜨린채, 식이요법(요오드가 들어있는 것은 전부 금지- 거의 먹을 것이 없음)을 한달동안이나 하고, 영양섭취와 물 부족으로 대사기능에 문제가 생겨서 응급실에 가기도 하고... 식이요법을 할때는 갑상선기능이 저하되면서 맛의 왜곡, 즉 모든 먹는 것에서 아스팔트같은 '고무탄 내'가 난다고 호소하고, 또 막상 조금이라도 먹으면 미식거리고... 게다가 몇가지 안되는 음식만을 먹어야 하니... 정말 먹을 게 거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끝으로 그녀는 출입금지 된 방사선치료 방에서 홀로 2박3일을 갇혀 있어야 했다. 안내방송의 지시에 따라 스스로 밀봉 되어있는 병을 뻰지로 열고 방사선 동위원소를 두 개 먹었다. 그리고 다른 몸기관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사탕과 오렌지쥬스와 물을 계속 마시면서 움직여야만 하고, 그렇게 해서 몸 속의 방사선 물질을 다시 몸 밖으로 배출해야만 했다. 얼굴은 거의 세배로 뚱뚱부어 있었고, 싸비는 자기 얼굴이 상상외로 너무나 크게 부은 걸 보고 마치 슈렉과 같았다고 회상한다.
이 후 집으로 돌아와서도 며칠을 따로 있어야(격리) 한다고... 아, 이런 원룸인데...
할 수 없이 집 앞에 대 놓은 차 안에서, 11월달에 빠다(우리 강아지)와 함께 두툼한 솜이불을 덮고 잠을 잤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의사 지침대로 따르는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예를들면, 빨리 방사능을 배출해야 되기 때문에, 되도록 물을 많이 먹도록 하라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물을 권하다가... 아뿔사~ 그녀의 예상치 못한 심한 짜증에 나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끝내 죽어도 못먹겠다고... 나는, "그냥 물인데... 그럼 한 모금이라도... 그래야 한다잖아!" 그녀는 그때마다 버럭!... 그리고 울었다. 그녀를 잃을까봐 두려웠었다.
난 어린아이처럼 우리가 왜 물 때문에 싸워야 하냐고 그녀에게 화를 내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보았는데 Tv에서 나온 항암치료중인 환자들이 정말 이런 똑같은 모습으로 배우자에게 화를 내는 게 아닌가! 내가 얼마나 바보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만 웃음이 나왔다.
...시간이 흘렀다. 다른 암들은 5년이지만 갑상선암은 7년이라고 한다. 이제 앞으로 2년반을 아무일 없이 보내면 완치 판정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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