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상자

곶감에 녹는 겨울

sav.. 2009. 1. 7. 02:33




 










대학 다닐때 대개 하숙생이 많았지만 나처럼 자취하는 후배가 근처에 또 있었다. 그때 그녀는 학교에 다니면서 새벽이면 신문을 배달한다고 했다. 그리고 늘 뭐든 열심이었다. 나를 비롯한 자취생들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사를 빈번하게 하기도 했는데 이사가봤자 대개는 모두 학교 근방에 집을 얻기에 그녀와 나의 집거리는 언제나 OO동 같은 동네였다. 그러다보니 종종 얼굴을 보게 되면서 사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또 맛있는 것도 가끔 함께 먹었던 것 같다. 얼마후 그녀(Y)는 또다른 내 후배(N)와 같이 합쳐서 살게 되었고...

Y가 졸업 후 컴퓨터에 관련된 일로 부산으로 떠나있는동안 나는 우연히 마을버스에서 그녀와 함께 살던 N을 만나게 되고, 당시 다급했던 나는 싸비와 함께 잠시 머물 곳을 찾아야만 하는 일이 생겼는데... N이 마침 근황을 묻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내 사정을 말하게 되었다.
그녀는 Y가 지금 없으니 그동안 자기 집에 와 있으라며 흔쾌히 허락했고, 우리는
나중에 Y가 돌아올때까지 두달정도 거기서 머물게 되었다. 그때 그곳을 나올때 부산에서 돌아온 Y를 다시 만나게 되었고... 이후 인연은 지금까지 지속되었다.

N은 내가 선배님이라며 자기방을 내주고 그녀는 거실에서 생활했다. 물론 난 괜찮다고 했지만...
그 후 나는 그래도 내가 끝까지 거절했어야 했다고 뒤늦은 후회를 하기는 했지만... 사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렇게 우연히 잠시 머물던 동네, 우리는 아직도 수없이 드나들던 좁은 골목길의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가진 그 허름한 공주수퍼를 여전히 만화처럼 정겹게 기억한다. 주로 라면과 맥주, 통조림 등을 샀던...

나는 그렇게 N에게 받기만 하고 N을 가끔 방문하는 일 이외엔 준 것이 아무것도 없어 늘 미안하기만 했는데, 세상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 그 후로 한 십수년후에 N의 친구 Y를 도울 일이 생기게 된 것이었다. 지방에 있는 그녀의 오빠가 뇌종양 선고를 받고 서울지역 병원을 알아보는 중이었다. 물론 무슨 대단한 일을 해준 것은 아니지만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서 내차로 모시고 오가는 일이었다.
몇해전에는 어머니를 여의었었고 또 삶이 언제까지인지 알 수 없는 오빠 때문에 그동안 생각도 없었던 결혼을 갑자기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언젠가 Y는 내게 말했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N의 소개로 괜찮은 남자를 소개 받았고 그녀는 드디어 결혼하게 되었는데...

싸비는 성의껏 동생일처럼 그녀의 결혼 준비를 도와주었다. 어느 날, 골라준 한복이 드디어 나온 날이었는데 그날은 결혼식 하루전 날이었다. 옷이 잘 나왔는지 우리는 그녀에게 한번 입어보라 했는데, 다행히 한복색은 잘 나왔지만 이상하게도 치마의 주름이 너무 심하게 부풀려져서 이뻐 보이지가 않았다.
나와 싸비는 시간이 없으니.. 할 수 없이 맘에 없는 '이쁘다'는 말을 하고, 그녀가 간 다음 바로 고민에 빠지고말았다. '뒤늦게 결혼하는 Y가 그 날 제일 이뻐보여야 하는데... 어쩌지..'

그리고 여기저기 바쁘게 전화해보기 시작했다. 부풀은 한복주름을 어떻게 해야하냐고...
처음엔 그것이 주문을 잘못한 것이라 생각했었기에 그것을 먼저 알지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방법을 알아내고 말았다. 드라이크리닝을 한번 해주면 주름의 숨이 팍! 죽는다는 것이었다.그래서 다급히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 빨리 맡길 수 있는 세탁소를 알아보라고 말해주고...
우린 다음날 지방으로 그녀의 결혼식을 찾아갔다. 결혼식후 가족친지, 친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 푸른빛의 아름다운 한복을 입고 나온 그녀를 보며.. 우린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행히 마음 편하게 웃었다.

학창시절 그녀는 재미로 친구들과 점을 본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당시 점쟁이가 나중에 그녀가 시골에 살게 될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그녀는 단한번도 생각해 본 일 없는 정말 택도 없는 소리라며 속으로 비웃고 그 자리를 나왔다고 한다.
'말이 되는 것이 사실상 지방에서 서울까지 유학을 왔는데 대도시 여대생이 다시 시골로 갈거라는 생각을 누가 할까,,,' 그런데 지금 그 점쟁이의 말이 생각난다면서... 정말 그렇게 되었다고... 얼마전 그녀는 수화기 속에 작은 웃음으로 말을 맺었었다.

그녀가 말린 곶감, 그 식구들이 정성으로 가꾼 표고버섯, 호두, 검은 콩... 그녀에게서 오늘 이런 선물이 왔다.
얼마전 내가 곶감을 너무나 좋아한다고, 그곳은 감으로 유명한 고장인데 니네 집에도 그거 말리냐며..
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너무 비싸서 나는 사먹지도 못한다고 하며.. 그럼 놀러가는 걸 한번 생각해보겠다고 농담삼아 던진 말이... 오늘 이렇게 좋은 선물이 되어 돌아왔다.

지난번 만났을때 그녀가 그러는데 정말 맛있는 것은 팔지 않는다고 시어머님이 말씀하셨다고 한다. 예컨데 과일중에 감이라면 더 맛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가 따로 있으며, 거기서 열리는 진짜 맛있는 것은 팔지않고 자기네 식구들이 먹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래서그런지 자기가 그동안 이렇게 살이 통통해졌다며 활짝 웃고 갔는데... 아마 이것이 그것이 아닐까,,, 정말 맛있는 그 곶감... 살짝 두 개를 먹어봤는데 정말 맛이 최고다...

내가 마음으로 가꾼 가장 좋은 것을, 나도, 내가 아는 좋은 친구들에게 나눠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 내게도 그런 날이 곧 오지 않을까...

sa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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