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버스

불온한 사랑

sav.. 2008. 7. 26. 14:28


      불온한 사랑                                                               원본-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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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l Brandt
 

오래전 한 여자가 있었네. 그녀는 스스로 바보인척 했지만 나는 그녀가 정말 바보인걸 알았지. 그녀는 어디서 주워 모은 얘기들을 마치 자기 얘기인냥 늘어 놓았어. 그래놓고는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엉엉 꺼이꺼이 울곤했지, 다시 오분도 지나지 않아 깔깔 웃었지만. 나는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했어. 그녀는 입으로 소리내 울었고 눈으로는 벌써 웃을 준비를 하고 있었지. 촉촉히 젖은 입술, 이는 아주 노랬는데 내가 없을때 줄담배를 피우는 걸 알 수 있었지. 그녀의 눈은 대체로 촛점없이 멍했는데 나는 처음에 그녀의 슬픔이 깊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곧 그냥 아무생각 없이 그렇다는걸 알게 되었어. 그녀는 자신앞에 놓여 있는 세계를 마치 어려운 미분방정식을 대면하는 것처럼 귀찮아 했어. 그녀는 빈칸처럼 웃었고 백지처럼 살았던 거야.

얼굴은 꽤나 반반했으므로 인기는 있었지. 자고로 친구란 서로 내면을 쏟아내야 하는 관계인 만큼 그녀는 친구가 전혀 없었지. 무슨 내면이 있어야 쏟아놓던지 배설하든지 할거 아냐? 그는 남자들과만 놀았고 있지도 않은 내면을 이해받지 못한다고 자주 칭얼댔지. 게다가 아주 기괴한 습성이 있었는데 이를테면 여자로서 잘 할 수 없겠다 싶은 것을 척척 잘해내는 것이었어. 남자 화장실에 아무렇지도 않게 따라 들어온다거나 갑자기 빽 소리를 지른다거나. 하지만 그건 주의를 끄는 하나의 방법에 불과 했지. 나는 그녀가 지극히 여성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 그녀의 장점이라곤 걸어갈때 엉덩이를 조금 요염하게 씰룩거린다 정도였으니까. 가끔 순간적인 재치를 발휘할때도 있었는데 그녀 자신 조차도 놀라워하며 입을 다물지 못하곤 했지.

나는 그런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어. 나는 그녀의 내면을 칭찬했고 그녀의 슬픔에 동조하는 척 했지. 나는 매일 유치한 시를 써서 그녀에게 갖다 바쳤어. 그러나 그녀에게 시의 내용은 별로 중요한게 아니었어. 시를 갖다 바치는 놈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지. 그녀는 내 시를 보고 얼굴을 찡그리곤 했는데 그녀의 평가는 늘 글자들의 배열이 얼마나 정연하고 깔끔한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어. 그녀는 직사각형의 길죽한 단을 좋아했는데 아마 자신이 쓰는 화장품병의 모양이 그와 비슷했던 것 같아. 어쨋든 그녀는 날씬한 걸 좋아했으니까. 우리는 만나 줄곧 담배를 피웠고 커피를 마셨고 공원을 걸어다녔지. 대화의 내용이란 것도 아주 웃겼어. 이를테면 이런식이었지.

"아, 난 널 사랑해."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어?"
"널 사랑하니까 난 알 수 있어"
"난 잘 모르겠어 네가 날 사랑하는지 아닌지"
"너는 나를 사랑해야해."
"왜?"
"내가 널 사랑하니까"
"그런데 내가 왜 널 사랑해야해?"
"너 같은 바보는 나이를 먹으면 한심해 보이기나 할뿐 아무도 사랑하려 들지 않을테니까"
"그럼 난 곧 끝난다는거야? 그리고 넌 보험같은 거고?"
"너는 붕괴하고 있는 방사성 원소같아"
"그런말 하지마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아"
"그러니까 넌 날 사랑해야해"
"왜?"
"바보같은 질문이야. 난 널 사랑해."
"창밖을 봐, 하늘은 푸르고 햇살이 즐겁게 공을 차고 있어"
"그건 내가 너에게 했던 말이야"
"나는 공을 차본적이 없어. 넌 날 이해못해"
"하지만 널 사랑해. 그거면 된거 아냐? 너는 하느님도 이해 못할 사람이야"
"나는 불교야"
"너는 무신론자야"
"너는 내가 문수보살처럼 웃는다고도 했어. 난 불교야"
"넌 소풍때 빼고는 절에 가본적도 없잖아. 넌 무신론자야"
"절을 좋아해. 공기도 좋고. 난 불교야"
"우리가 헤어지게 된다면 그건 네 책임이야. 나중에 후회해봐야 소용이 없다구"
"난 뭐든지 금방 잊어."
"금방 잊는다는건 눈 앞에 닥친 현실이 그 만큼 크게 부풀려져 보인다는 뜻이야.
넌 후회할거야"
"금방 잊을텐데 뭘"

나는 그녀가 바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바보일거라고 생각해. 그런 그녀를 만난 것이 나의 불행인지 나를 만난 그녀의 불행인지는 아직까지 확실치 않아. 그녀가 어디서 무얼하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알길이 없지. 하지만 누군가에게 시집가서 아기낳고 잘 살고 있다면 그 누군가는 정말 그녀 보다 더한 팔푼이 일거라고 나는 감히 장담해. 세상 여자들이 대체로 시집을 잘 못가는 것을 보면 천하의 바보인 그녀가 잘 살고 있다는 상상이야 말로 내게는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 될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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